전체 글392 라임병 (진드기 감염, 유주성 홍반, 진단 한계) 강원도 산길을 반바지 차림으로 걷다가 종아리에 과녁 모양 붉은 반점이 생겼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모기 물림이라 생각했는데, 열흘이 지나도록 반점이 커지고 몸살까지 겹쳤습니다. 그게 라임병이었습니다. 국내에서 매년 20~30건 정도 신고되는 제3급 법정 감염병, 하지만 저는 그 숫자가 현실을 얼마나 좁게 담고 있는지 몸으로 먼저 알았습니다.평창 산길이 남긴 과녁 자국, 라임병 감염 경로혹시 야외 활동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붉은 반점을 발견한 적 있으신가요? 저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그 반점이 날마다 사방으로 퍼지며 도넛 형태로 번질 때,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라임병은 보렐리아속균(Borrelia burgdorferi 등)에 감염된 참진드기가 사람을 물면서 균이 체내로 침.. 2026. 6. 23. 사랑니 발치 (발치 적기, 매복 사랑니, 하악관 손상) 스물두 살, 왼쪽 턱 안쪽이 체한 것처럼 묵직하게 부어올랐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치과 의자에 앉아 파노라마 X선 필름을 처음 받아든 순간, 제 입속에 네 개의 시한폭탄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사랑니 발치, 막연히 무서웠던 그 단어가 제 이야기가 된 날이었습니다.뼈가 좁아진 시대, 사랑니가 문제가 되는 이유사랑니는 치의학적으로 제3대구치라 부릅니다. 위아래 각각 두 개씩, 어금니열의 맨 끝에 나는 마지막 치아입니다. 과거 거친 음식을 짓이겨야 했던 시절에는 반드시 필요한 저작 기관이었지만, 부드러운 가공식품 중심으로 식습관이 바뀌면서 인간의 악골, 즉 턱뼈 자체가 수천 년에 걸쳐 작아졌습니다. 그 결과 사랑니가 나올 자리가 턱없이 부족해졌고, 지금 우리는 그 대가를 치르.. 2026. 6. 23. 흉수검사 (이뇨제 왜곡, 라이트 기준, 오진 위험)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성태 형이 가슴에 물이 찼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저는 병원에서 액체를 뽑아 분석하면 원인이 금방 밝혀질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곁에서 지켜본 과정은 전혀 달랐습니다. 수치는 뚜렷하게 나왔는데, 그 수치가 오히려 형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가슴에 물이 찬다는 것, 흉막 삼출증의 실체흉막 삼출증(Pleural Effusion)이라는 진단을 처음 들었을 때 형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흉막 삼출증이란, 폐를 감싸는 흉강이라는 공간에 액체가 비정상적으로 고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원래 흉강 안에는 5~15mL 정도의 소량 체액이 있어 숨 쉴 때마다 폐와 갈비뼈가 부딪히지 않도록 윤활제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어떤 원인으로 .. 2026. 6. 22. 흉선암 (완전절제, 면역파산, 정밀면역치료) 흉선암은 인구 100만 명당 고작 한두 명에게 발생하는 희귀암입니다. 저는 이 숫자가 얼마나 무의미한 위안인지, 형의 병상 곁에 앉아 처음 실감했습니다. 칼로 완벽하게 도려냈다고 했는데, 형은 왜 그 뒤로도 숨을 쉬지 못했을까. 그 질문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습니다.완전절제(R0)라는 선언이 감춘 것들흉선암 치료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완전절제, 의학 용어로는 R0 절제(R0 Resection)입니다. R0 절제란 수술 후 절제 단면에 암세포가 육안 및 현미경 검사상 전혀 남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눈으로 보이는 암 덩어리를 깨끗이 다 잘라냈다"는 선언입니다. 제가 아는 민우 형의 주치의도 수술실을 나오며 정확히 그 말을 했습니다. "주변 지방 조직까지 단 1밀리미.. 2026. 6. 22. 발진티푸스 (브릴-진서병, 유전체 축소, 잠복 감염) "국내 발생 제로." 의학도 시절 저는 이 문장 하나로 발진티푸스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 그런데 임상 현장에서 만난 한 노인 환자가 그 확신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몸니 한 마리 없는 깨끗한 아파트에서, 수십 년 전 앓았던 발진티푸스가 그의 몸 안에서 스스로 부활한 것입니다.교과서 속 박제된 공포, 그 이면의학도 시절 도서관 서가 깊숙이 꽂혀 있던 낡은 감염병학 교과서를 꺼내 들었을 때, 발진티푸스 항목 위에는 얇은 먼지가 쌓여 있었습니다. 리케치아 프로와제키이(Rickettsia prowazekii)라는 긴 라틴어 이름 옆에는 흑백 사진 속 참호가 있었고, 그 안의 사람들은 14세기 페스트화보 속 인물들처럼 아득한 시간의 저편에 속해 있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 국내 발생 건수 제로." .. 2026. 6. 21. 세기관지염 (천명음, 대증요법, 기도 리모델링) 아이가 처음 밤새 쌕쌕거리는 소리를 냈을 때, 저는 단순한 감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갈비뼈 사이가 안쪽으로 꺼져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세기관지염은 2세 미만 영유아에게 겨울철 입원을 일으키는 가장 흔한 원인입니다. "특별한 약이 없으니 지켜보면 됩니다"라는 말 뒤에 감춰진 것들을 직접 겪고 나서, 이 병을 다르게 보게 되었습니다.새벽 숨소리가 심상치 않을 때 — 천명음을 놓치면 안 되는 이유아이를 키우다 보면 기침 소리 하나에도 예민해지는 시기가 옵니다. 저도 처음엔 "좀 지나면 낫겠지" 하고 넘겼는데, 새벽 두 시쯤 아이의 숨소리에서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바로 천명음(Wheezing)입니다. 천명음이란 공기가 좁아진 .. 2026. 6. 21. 이전 1 ··· 28 29 30 31 32 33 34 ··· 6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