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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아지 (공리주의, 도덕적 상해, 재난의료)

by insight392766 2026. 7. 28.

생존율 0.1%인 환자 한 명을 포기하는 대신, 10% 이상의 중상자 다섯 명을 살릴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저는 그 선택을 손수 내려봤습니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검은색 표지를 꺼내 들며.



공리주의가 현장을 지배하는 순간

트리아지(Triage)란 '선별하다'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온 말로, 재난 현장에서 한정된 의료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해 환자의 생존 가능성과 긴급성에 따라 치료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시스템입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 의무총감 도미니크 장 라레(Dominique Jean Larrey)가 체계화했고, 이후 현대 재난의료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이 시스템의 철학적 뿌리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입니다. 공리주의란 "최대 다수에게 최대의 이익을 주는 행위가 옳다"는 윤리 원칙으로, 트리아지는 바로 이 논리 위에서 작동합니다. 교과서에서 읽을 때는 꽤 설득력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현장에서 그 논리를 집행해야 했을 때, 그 차가운 합리성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대형 다중 추돌 사고 현장에서 선배는 장비를 내리며 제 어깨를 꽉 쥐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치료하는 게 아니라 분류하는 거다." 그 손의 떨림이 모든 걸 말해줬습니다.

트리아지는 환자를 빨간색(긴급), 노란색(응급), 초록색(비응급), 검은색(관망·사망)으로 분류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긴급구조대응활동 및 현장지휘에 관한 규칙」에 따라 119구급대와 재난의료지원팀(DMAT)이 이 서식을 활용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DMAT이란 Disaster Medical Assistance Team의 약자로, 쉽게 말해 재난 현장에 즉시 출동하는 전문 의료지원팀을 뜻합니다. 이 시스템 자체는 분명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완벽한 정답'으로 추앙하기엔, 제가 두 눈으로 목격한 현실이 너무 많습니다.

요약: 트리아지는 공리주의 철학에 기반한 재난 현장 환자 분류 체계이며, 그 냉철한 논리는 실제 현장에서 전혀 다른 무게를 지닌다.

관망(흑색)의 윤리적 폭력성

그날 밤, 제가 가장 오래 멈춰 섰던 자리는 차체 구석에 엎드려 있던 청년 앞이었습니다. 호흡도, 맥박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기도 개방을 시도했지만 반응이 없었고, 규칙대로라면 검은색 표지를 부착하고 즉시 다음 환자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 수 초 사이에 제 안의 무언가가 툭 부러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트리아지에서 관망(흑색) 단계란, 생존 가능성이 극히 낮아 현재 가용한 자원으로는 소생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된 환자를 치료 대상에서 일시 배제하는 분류입니다. 이것이 의학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데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옳다는 것과, 그 선택이 인간의 존엄성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트리아지를 '효율적인 자원 배분'으로만 설명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거기서 한 가지가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흑색 표지가 붙은 환자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완화 의료(Palliative Care)조차 제공받지 못한 채 방치됩니다. 완화 의료란 완치가 불가능한 환자에게 통증을 줄이고 존엄한 마지막을 보장하는 의료 행위를 말합니다. 자원이 부족한 재난 현장에서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 그 사실은 시스템의 한계로 솔직히 인정되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고령자, 중증 장애인, 기저질환자는 동일한 외상을 입더라도 생존 예상 가능성 점수가 낮게 측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시스템이 의도한 결과가 아닐지 몰라도, 사회적 취약계층이 구조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구조적 차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현장에서 그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흐릿합니다.

  • 관망(흑색) 단계 환자는 완화 의료 없이 방치될 수 있어 인간 존엄성 훼손 우려가 있습니다.
  • 고령자·장애인·기저질환자는 동일 외상에서도 낮은 생존 점수를 받아 구조 배제 위험이 있습니다.
  • 자원이 확보되면 등급을 즉시 재조정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현장 여건이 이를 보장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약: 관망(흑색) 분류는 의학적 합리성을 지니지만, 존엄성 보장과 취약계층 차별이라는 윤리적 공백을 동시에 내포한다.

분류 담당자가 짊어지는 도덕적 상해

사고 현장이 정리되고 소방서로 돌아오는 차 안은 무거운 침묵뿐이었습니다. 저는 손때가 묻은 분류 표지 뭉치를 내려다보며 생각했습니다. 트리아지 교범은 대원이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환자를 판정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표지를 손에 쥐는 사람은 피와 눈물을 가진 인간입니다.

도덕적 상해(Moral Injury)란, 자신의 도덕적 신념이나 직업적 사명과 충돌하는 행위를 강요받았을 때 발생하는 심각한 심리적 손상을 말합니다. 단순한 스트레스를 넘어, 자기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근본적인 자기 부정으로 이어집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와 중복되기도 하지만, 도덕적 상해는 특히 "내가 옳은 일을 했는가"라는 질문이 지속적으로 내면을 갉아먹는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그 질문은 현장이 끝난 뒤에도 따라붙습니다. 중년 남성 옆에서 제 바지를 잡고 울부짖던 그의 아내 손을 떨쳐내고 돌아섰을 때, 저는 매뉴얼대로 움직였습니다. 그 선택은 옳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는 매뉴얼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트리아지 체계는 '전체 생존자 수'라는 거시적 성과를 측정하는 데는 능숙합니다. 하지만 그 결정을 내린 현장 인력의 정신건강이 얼마나 소모되는지에 대한 제도적 안전망은 여전히 미흡합니다. 미국의 연구에 따르면 재난 대응 이후 응급의료 종사자의 PTSD 발생률은 일반 직군 대비 두 배 이상 높은 것으로 보고됩니다(출처: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NIH), PubMed Central). 분류 담당자가 겪는 도덕적 상해는 시스템의 설계 결함이 아니라, 시스템이 애초에 고려하지 않은 인간의 영역입니다.

요약: 트리아지는 현장 대원에게 도덕적 상해를 필연적으로 부과하며, 이에 대한 심리적 지원 체계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현대 재난과 AI 트리아지의 새로운 과제

나폴레옹 전쟁의 전장을 전제로 설계된 트리아지 알고리즘이 오늘날의 재난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병원들은 중환자실(ICU) 병상과 인공호흡기 부족 속에서 병원 단위의 트리아지를 사실상 강제로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외상 중심 분류 알고리즘인 START(Simple Triage And Rapid Treatment) — 즉 현장에서 신속하게 호흡·맥박·의식을 점검해 환자를 분류하는 방식 — 은 감염병 재난에서는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격리 요건과 오염 제거 과정이 더해지면서 분류 프로세스 자체가 마비되는 상황이 속출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팬데믹 상황에서의 희소 자원 배분 윤리 지침을 별도로 발행할 만큼, 기존 트리아지 체계의 한계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바 있습니다(출처: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최근에는 주관적 판단을 줄이기 위해 인공지능 기반의 디지털 트리아지 시스템 도입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설득력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알고리즘이 생명을 결정하는 순간 오류가 발생했을 때, 그 법적·윤리적 책임 소재는 누구에게 있을까요. AI가 흑색 판정을 내린 환자가 살 수 있었다면, 그 결과는 시스템의 오류인가요, 아니면 그 시스템을 승인한 기관의 책임인가요.

저는 기술 도입 자체보다, 도입 이전에 윤리적 가이드라인을 충분히 만들어야 한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차가운 알고리즘에 인간의 판단까지 위탁해버리는 순간, 트리아지가 안고 있던 윤리적 긴장감마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긴장감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이 시스템이 여전히 인간적임을 증명하는 마지막 증거이기도 합니다.

요약: 감염병·복합 재난에서 기존 START 알고리즘은 한계를 드러냈으며, AI 트리아지 도입은 책임 소재와 윤리 가이드라인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주 묻는 질문

Q. 트리아지에서 검은색 표지를 받으면 무조건 포기하는 건가요?

A. 그렇지 않습니다. 관망(흑색) 분류는 현재 자원 상황에서의 일시적 판단이지, 영구적인 포기가 아닙니다. 현장 여건이 개선되거나 환자 상태가 자력으로 호전되면 즉시 등급을 재조정해 치료에 들어가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다만 실제 현장에서 그 재조정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Q. 평시 응급실에도 트리아지가 있나요?

A. 평시 대형병원 응급실에서는 재난 현장의 트리아지와 구별되는 K-TAS(Korean Triage and Acuity Scale)를 사용합니다. K-TAS는 캐나다의 응급실 분류 체계를 한국 환경에 맞게 개정한 것으로, 자원이 고갈된 상황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관망(흑색) 단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장 생명이 위급하지 않은 환자도 순서가 밀릴 뿐 결국 치료를 받게 됩니다.


Q. 트리아지 담당 대원들은 나중에 심리 치료를 받나요?

A. 제도적으로는 심리 지원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현장이 끝난 뒤 그 지원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는 기관마다 편차가 큽니다. 도덕적 상해(Moral Injury)는 단순 상담 몇 회로 해소되기 어려운 깊은 심리적 손상이라, 보다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트라우마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Q. 트리아지를 도입한 나라는 어디인가요?

A. 트리아지는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선진국 재난의료 시스템에 도입되어 있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한국 등이 각국 환경에 맞게 변형된 분류 체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앞서 언급한 대로 DMAT과 119구급대가 법령에 따라 트리아지 서식을 활용합니다.


결론

트리아지는 차갑습니다. 그리고 그 차가움은 불가피합니다. 제가 그날 검은색 끈을 묶으며 느꼈던 죄책감은 시스템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 시스템이 인간에게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우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트리아지를 효율적인 자원 배분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관망 단계 환자에게 최소한의 존엄을 보장하는 방안, 분류 담당자의 도덕적 상해에 대한 장기적 심리 지원, 그리고 AI 트리아지 도입 시 윤리 가이드라인 — 이 세 가지가 함께 논의되어야만 트리아지는 비로소 차가운 효율의 도구를 넘어 진짜 의미의 생명 존중 시스템이 될 수 있습니다. 재난 현장의 알록달록한 천막이 뉴스에 보인다면, 그 색깔 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5ATNlA57R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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