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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말과 헝가리, 은퇴작, 미니멀리즘

by insight392766 2026. 1. 19.

영화 토리노의 말 포스터

 

헝가리 영화의 거장 벨라 타르가 세상에 내놓은 2011년 작 <토리노의 말>은 한 예술가가 자신의 커리어를 마무리하며 던지는 가장 무겁고도 정직한 작별 인사입니다. 이 영화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형식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과 피할 수 없는 소멸의 과정을 응시합니다. 헝가리 작가주의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미학적 종착지로서, 이 은퇴작은 화려한 수식어를 걷어낸 자리에 남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관객의 마음속에 깊게 각인시킵니다.

헝가리 영화 전통과 미학의 종착점

영화사에 기록된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만큼 단호하고 결연한 태도를 취하는 영화는 드물 것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한 노감독이 카메라를 내려놓기 전에 만든 결과물이 아니라, 수십 년간 헝가리 영화 전통이 쌓아온 미학적 실험과 철학적 사유가 집대성된 거대한 비석과도 같습니다. 헝가리 영화는 본래 특유의 느린 호흡과 긴 롱테이크를 통해 인간 내면의 심연을 탐구해 왔는데, 벨라 타르는 이 작품에서 그 형식을 가장 날카롭고 급진적인 지점까지 밀어붙입니다. 저는 극장의 어둠 속에서 흑백의 영상이 시작될 때, 마치 거대한 파도가 천천히 밀려와 나의 모든 감각을 잠식해 버리는 것 같은 기묘한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헝가리의 황량한 풍경은 지리적 경계를 넘어 인류 전체가 마주한 실존적 절벽을 상징합니다. 쉼 없이 불어닥치는 바람과 먼지, 그리고 그 안에서 묵묵히 하루를 살아내는 부녀의 모습은 국가나 시대를 초월한 인간 보편의 고통을 시각화합니다. 헝가리라는 구체적인 토양 위에서 피어난 이 무거운 서정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삶의 본질적인 건조함을 마주하게 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 가슴을 짓눌렀던 것은, 어쩌면 우리 삶의 본질 역시 이토록 반복적인 행위들의 집합체일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깨달음이었습니다. 감독은 이 척박한 땅의 공기를 카메라에 담아내며, 헝가리 영화가 지켜온 예술적 자존심이 도달할 수 있는 최전선을 보여줍니다. 묵직한 카메라 워킹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감독의 시선을 빌려 세계의 종말을 미리 체험하는 듯한 경외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은퇴작이기에 가능한 완전한 응시의 자유

벨라 타르는 이 작품을 끝으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그것은 창작의 에너지가 고갈되어서가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가 도달할 수 있는 결론에 이미 가닿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퇴작이라는 위치는 감독에게 타협할 필요가 없는 절대적인 자유를 부여합니다. 그는 관객을 설득하려 하지도, 친절하게 설명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존재함 그 자체를 목격하게 만들 뿐입니다. 저는 영화 속 아버지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뒷모습을 보며, 그것이 어쩌면 영화라는 세계를 떠나보내는 감독 자신의 뒷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화려한 서사나 극적인 갈등을 지워버린 자리에 남은 것은 매일 아침 껍질을 까서 먹는 뜨거운 감자 한 알과 말의 슬픈 눈망울뿐입니다. 은퇴작으로서의 이 영화는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는 완전한 침묵의 상태를 지향합니다. 설명과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감독의 태도는 관객에게 고통스러운 동시에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우리는 대개 영화가 무언가 답을 주거나 위로를 건네기를 기대하지만, 벨라 타르는 그저 보라고 명령할 뿐입니다. 은퇴를 앞둔 예술가가 도달한 이 차갑고 투명한 시선은, 영화가 인간의 운명을 응시하는 가장 고귀한 방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6일간의 기록을 통해 빛이 사라지고 물이 마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감독이 영화 인생 전체를 통해 갈구해 온 진실에 대한 최종 보고서와 같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예술가가 커리어를 마무리하며 남긴 마지막 유언을 듣게 됩니다. 이 단호함은 한 시대의 거장이 자신이 사랑했던 매체에 바치는 가장 경건한 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니멀리즘 언어로 구축한 소멸의 풍경

<토리노의 말>을 규정하는 핵심은 단연 미니멀리즘입니다. 벨라 타르의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스타일의 문제를 넘어선 하나의 세계관이자 실천적인 철학입니다. 영화는 극도로 절제된 대사와 제한된 공간,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의 편린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중적인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이러한 방식은 견디기 힘든 고역일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의 진짜 힘이 발휘됩니다. 관객은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화면 속의 시간과 무게를 직접 육체적으로 견뎌내야 하는 동반자가 됩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지루하게 느껴졌던 감자를 먹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그 단순한 행위 속에 깃든 생존의 비장함에 숙연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미니멀리즘은 이 영화에서 세계가 소멸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가장 적합한 방식입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이어지는 서사 구조는 성서의 창세기를 뒤집어 놓은 듯한 파괴의 기록입니다. 빛이 사라지고, 물이 마르며, 불이 꺼지는 일련의 과정들은 미니멀리즘적 생략과 반복을 통해 더욱 극대화됩니다. 벨라 타르 감독은 서사라는 장치를 덜어냄으로써 관객이 오직 이미지와 소리,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거친 바람 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려오는 가운데 정지된 듯 움직이는 카메라를 보고 있으면, 마치 제가 그 황량한 마구간 한구석에 버려진 존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이것은 이야기가 주는 감동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론적인 전율에 가깝습니다. 모든 것을 비워낸 끝에 남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립과 고요한 침묵입니다. 저는 이 침묵이 그 어떤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보다 더 크게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습니다. 화려한 영상미와 빠른 편집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벨라 타르가 제시하는 이 텅 빈 공간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시간의 본질을 되찾아줍니다. 삶의 군더더기를 걷어냈을 때 마주하게 되는 그 서늘한 진실은, 영화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영혼의 거울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미니멀리즘은 그렇게 소멸을 응시하는 가장 정직한 눈이 되어 우리 곁에 남습니다. 서사를 제거함으로써 오히려 인간 존재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소멸되지 않는 강한 질문을 관객에게 남깁니다. 삶의 무게가 너무 가볍게 느껴질 때, 이 거장이 남긴 미니멀리즘의 정수는 우리에게 멈춰 서서 스스로를 돌아볼 용기를 건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