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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텐 속 테헤란, 종교와 일상, 이란 여성

by insight392766 2026. 1. 18.

영화 텐 포스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텐>은 테헤란이라는 거대 도시를 배경으로, 자동차라는 폐쇄적이고도 이동적인 공간 속에서 이란 여성들이 마주하는 삶의 단면들을 열 개의 에피소드로 포착해 낸 수작입니다. 종교적 규범과 현대적 갈망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여성들이 내뱉는 목소리는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애처로우며, 그 대화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란 사회의 심부까지 가닿게 됩니다. 영화적 수식과 연출을 극도로 배제한 채 오로지 인물의 발화와 침묵에 집중하는 이 작품은, 오늘날 여성 서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도 강렬한 리얼리즘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테헤란이라는 도시가 만든 여성의 일상

영화 <텐>을 보는 내내 제 시선은 운전석에 앉은 여성의 손과 그 창밖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테헤란의 풍경에 머물렀습니다. 이 영화의 모든 서사는 달리는 자동차 안이라는 지극히 제한된 공간에서 발생하는데, 이는 단순한 배경 설정을 넘어 이란 여성들이 처한 사회적 위치를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장치입니다. 자동차는 그녀들에게 외부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안식처인 동시에, 결국은 정해진 도로 위를 순환할 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테헤란이라는 도시는 종교적 엄숙주의와 현대 문명의 이기가 기묘하게 동거하는 공간이며, 영화 속 주인공은 이 도시의 혈관 같은 도로를 유영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재확인합니다.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자율성을 의미하지만, 창밖을 메운 남성 중심적 사회의 규칙들은 끊임없이 차 안의 공기를 압박해 옵니다. 저는 주인공이 복잡한 교차로를 지나며 내뱉는 깊은 한숨에서 이란 여성이 짊어진 보이지 않는 굴레를 느꼈습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도시의 화려함이나 비극을 과장하여 전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반복되는 신호 대기와 무미건조한 도로의 흐름을 통해, 일상이 얼마나 촘촘한 규제 속에서 흘러가고 있는지를 담담하게 증언합니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테헤란이라는 도시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이자, 여성들의 발언을 억누르거나 혹은 촉발하는 능동적인 인물처럼 기능하게 만듭니다. 영화를 보며 문득 우리가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이동의 자유가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치열한 투쟁의 결과물일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무표정한 행인들과 건물들은 주인공이 겪는 내면의 폭풍과는 무관하게 견고해 보이기만 합니다. 이 대비가 주는 쓸쓸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란이라는 낯선 공간을 넘어서, 규범과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고뇌를 마주하게 합니다. <텐>은 테헤란의 도로 위에서 길을 찾는 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의 공간이 어떻게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하는지를 서늘할 정도로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종교와 일상이 충돌하는 순간들

<텐>의 세계에서 종교는 거창한 사원이나 경전의 구절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물들이 주고받는 농담, 히잡을 고쳐 쓰는 손길, 그리고 이혼과 결혼을 바라보는 서늘한 시선 속에 아주 깊숙이 박혀 있습니다. 종교가 일상의 공기 자체가 되어버린 사회에서 신념과 현실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습니다. 저는 특히 주인공이 자신의 아들과 나누는 대화 장면들에서 형용할 수 없는 답답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논리를 그대로 복제하여 어머니를 비난할 때, 종교적 가치관이 세대를 거쳐 어떻게 한 개인의 내면을 잠식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뒤흔드는지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대화들은 세밀하게 짜인 각본이라기보다 마치 누군가의 은밀한 고백을 도청하는 듯한 생생함을 전달합니다. 이란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과 의무에 대한 담론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한 전제로 작동하며, 주인공은 그 전제에 균열을 내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내뱉습니다. 하지만 그 말들은 종종 종교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 공허하게 되돌아오곤 합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여기서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 지를 가려내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종교적 이상과 개인의 욕망이 부딪히며 발생하는 파열음을 있는 그대로 들려줌으로써, 관객이 이 복잡한 실타래를 스스로 응시하게 만듭니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이 마주하는 다양한 여성들의 사연 중에서도 종교적 규범에 순응하며 위안을 찾는 이들과 그로부터 탈주하려는 이들의 대비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는 종교가 누군가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기둥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숨통을 조이는 밧줄이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합니다. 영화는 결코 종교를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않지만, 그 일상적인 억압의 무게를 관객의 어깨 위에 고스란히 얹어줍니다. <텐>을 보며 제가 깨달은 것은, 진정한 비극은 거대한 악의 출현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 스며든 당연시되는 규범들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란 여성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리얼리즘

이 영화가 지닌 가장 강력한 마력은 카메라 앞에 선 여성들이 쏟아내는 가공되지 않은 목소리에 있습니다. 전문 배우가 아닌 일반인들의 출연은 연기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며, 관객을 테헤란의 좁은 차 안으로 직접 초대합니다. 여성들이 자신의 이혼 경력을 이야기하거나, 성적인 고민을 털어놓고, 혹은 종교적 회의감을 고백할 때 그 목소리에는 어떠한 가식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들의 투박하지만 진실된 언어를 들으며, 그동안 서구적 시선이나 타자의 시각으로 재단되어 온 이란 여성의 이미지가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를 통렬하게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속 여성들은 결코 단순한 피해자로만 박제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모순적인 행동을 보이며, 자신들을 억압하는 사회적 시선을 스스로 내면화하여 서로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과 모순이야말로 이 영화가 도달한 리얼리즘의 핵심입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여성들을 대변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고, 오로지 그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내어줍니다. 고정된 카메라 앵글은 인물의 표정 하나, 눈 떨림 하나 놓치지 않으며 그들의 진심을 담아냅니다. 저는 화면을 응시하면서 가끔은 숨이 막힐 듯한 현장감에 카메라를 외면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습니다. 이 영화를 지탱하는 열 개의 에피소드는 파편화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 '말하기'라는 행위를 통해 하나의 거대한 여성 서사를 완성합니다. 침묵을 강요받던 이들이 좁은 차 안에서 내뱉는 언어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해방 선언과도 같습니다. <텐>은 영화가 화려한 조명과 극적인 장치 없이도 얼마나 깊은 진실을 길어 올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예시입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제 귓가에 남은 것은 주인공의 단호한 목소리와 뒤섞인 테헤란의 소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영화적 체험을 넘어, 이름 모를 타인의 고통과 희망에 깊이 공명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순간이었습니다. <텐>은 테헤란이라는 도시, 종교와 일상이 교차하는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란 여성을 과장 없이 보여주며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작품은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며, 침묵 속에서 더 강렬한 진실을 드러냅니다. 여성 서사에 깊은 관심을 둔 관객이라면 이 영화가 제안하는 극도로 절제된 방식의 리얼리즘에 매료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이 영화를 통해 여성의 삶과 역사가 결코 타인의 언어로만 규정될 수 없음을, 그리고 가장 내밀한 대화가 때로는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울림이 될 수 있음을 마주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