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살다>는 평생을 시청의 민원과장으로 일하며 ‘미라’처럼 살아온 주인공 와타나베가 위암 판정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남은 생애 동안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무기력한 관료주의 사회에 던지는 날카로운 비판과 더불어,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한계 앞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선택이 무엇인지 탐구합니다. 이 작품은 흑백의 화면 속에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라는 보편적인 테마를 섬세하고도 강렬하게 녹여내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관료주의 속에서 소멸되는 개인의 존재
영화 <살다>의 도입부는 숨 막힐 듯 답답한 시청 사무실의 풍경으로 시작됩니다. 주인공 와타나베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류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고, 그는 그저 기계적으로 도장을 찍을 뿐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관료주의는 단순히 업무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고, 창의성과 공감 능력을 거세하는 거대한 사회적 장치로 묘사됩니다. 영화 속 시청 공무원들은 주민들의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민원서류를 이 부서 저 부서로 떠넘기기에 바쁩니다. 이러한 ‘떠넘기기’의 연쇄 속에서 시민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는 증발해 버리고, 오직 절차와 형식만이 남게 됩니다. 와타나베는 이 시스템의 가장 충실한 부품이었습니다. 그는 30년 동안 단 한 번도 결근하지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그 30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감독은 와타나베의 무표정한 얼굴과 구부정한 뒷모습을 통해, 거대 조직 속에서 이름 없는 존재로 소멸해 가는 개인의 비극을 차갑게 조명합니다. 그는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미라’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서늘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역시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혹은 사회적 역할이라는 가면 뒤에서 와타나베처럼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서류상의 존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관료주의라는 늪은 단순히 공공기관의 문제가 아니라,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채 인간을 수단화하는 모든 시스템에 대한 은유입니다. 그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의지보다는 시스템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며, 결국 스스로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는 실존적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영화는 이 비인간적인 풍경을 집요하게 비춤으로써, 이후 와타나베가 겪게 될 변화의 극적인 진폭을 준비합니다.
시한부의 삶이 가져온 각성의 순간
와타나베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는 순간, 그를 지탱하던 공고한 관료주의의 성벽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립니다. 의사의 완곡한 사형 선고를 듣고 병원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갈 곳을 잃고 헤맵니다. 흥미로운 점은 죽음의 선고가 그에게 공포만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끝이 가시화되자, 비로소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텅 비어 있었는지를 처절하게 깨닫습니다. 평생을 모아 온 저금도, 무심한 아들도 그에게 위안이 되지 못합니다. 그는 처음으로 무단결근을 하고 유흥가를 전전하며 타락을 시도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술과 춤, 낯선 이와의 만남은 잠시의 마취제일 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지는 못합니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시한부의 삶’이 인간에게 주는 역설적인 선물을 보여줍니다. 시간이 무한하다고 믿을 때 우리는 오늘을 내일로 미루며 살아가지만, 끝이 정해진 순간부터는 매 초가 선택의 연속이 됩니다. 와타나베는 우연히 만난 젊은 부하 직원 토요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발견합니다. 그녀의 활기찬 손길과 웃음소리는 죽어있던 와타나베의 감각을 깨웁니다. 그는 토요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즐겁게 살 수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녀가 보여준 답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공장에서 장난감 토끼를 만들며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는 단순한 보람이었습니다. 이 작은 깨달음은 와타나베를 각성시킵니다. 죽음을 앞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은 자신의 파멸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시간을 통해 타인의 삶에 작은 빛을 비추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시한부 판정은 그에게 삶의 ‘질’을 고민하게 만든 장치였습니다. 죽음이라는 거울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민낯을 마주한 그는, 이제 도망치는 대신 정면으로 삶을 돌파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은 파멸을 향한 행진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위대한 여정의 시작입니다.
인생관과 죽음의 문턱에서 피어난 진정한 삶의 가치
영화의 후반부, 와타나베는 이전의 무기력했던 민원과장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던집니다. 그는 악취 나는 상습 침수 구역을 메우고 아이들을 위한 공원을 조성해 달라는 주민들의 간절한 요구를 가슴에 품습니다. 상사들의 비아냥과 다른 부서의 방해, 심지어 야쿠자의 협박까지 이어지지만 와타나베는 굴하지 않습니다. 그는 더 이상 관료주의의 부품이 아니라,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진 독립된 인간으로서 행동합니다. "나는 누군가를 미워할 시간이 없다"는 그의 말은, 증오나 두려움조차 사치일 만큼 자신의 삶이 소중해졌음을 의미합니다. 마침내 공원이 완공되고, 눈이 내리는 고요한 밤에 와타나베는 자신이 만든 공원의 그네에 앉아 나지막이 노래를 부릅니다. "인생은 짧으니 사랑을 하라, 그대여..."로 시작되는 그 노래는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장엄한 레퀴엠이자 승전보와 같습니다. 와타나베의 죽음 이후 열린 장례식 장면은 이 영화가 가진 인생관의 깊이를 더해줍니다. 동료들은 술기운에 그의 희생을 칭송하며 자신들도 변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그들은 다시 예전의 무기력한 공무원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지라도, 와타나베라는 한 개인이 남긴 공원에서는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다>가 제시하는 인생관은 결코 거창한 영웅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발 딛고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태도입니다. 타인의 인정이나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심과 생의 감각에 충실했던 와타나베의 마지막 모습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곧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질문임을 증명합니다. 눈 덮인 공원에서 평온하게 숨을 거둔 그의 모습은 진정한 구원이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헌신과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과정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삶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진짜 삶’을 살았던 와타나베의 짧고도 긴 여정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당신의 그네는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당신은 지금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와타나베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자신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혹시 우리도 매일 같은 시간 지하철에 몸을 싣고, 기계적인 인사를 나누며, 의미 없는 서류들에 마음을 쏟고 있지는 않나요? 영화는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당신이 걷는 보폭이 60cm든 100cm든, 그 수치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느냐는 본질적인 방향성이라고 말이죠. 삶의 의미는 대단한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마주한 누군가에게 건네는 진심 어린 배려와 나만의 작은 공원을 만들어가는 성실함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살다>라는 강렬한 제목처럼, 우리는 그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뜨겁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와타나베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자, 이 영화가 영원한 고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