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울의 아들>은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사적 비극을 재현함에 있어, 그 어떤 영화보다도 참혹하고 정교한 시선을 견지합니다. 카메라는 역사적 서사 대신 한 인간의 등 뒤를 집요하게 쫓으며, 지옥의 문턱에서 피어난 기묘한 집착을 조명합니다. 이 글에서는 수용소라는 거대한 죽음의 공장 안에서 유대인 개인이 마주한 실존적 위기와, 불가능에 가까운 '구원의 몸짓'이 우리에게 던지는 윤리적 화두를 깊이 있게 분석합니다.
유대인 사울이 짊어진 지옥의 시선과 개인의 실존
라슬로 네메스 감독의 <사울의 아들>은 홀로코스트를 거대한 역사적 담론이나 민족의 수난사로 설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대신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에서 시체 처리를 전담하는 유대인 작업반, 즉 '존더코만도'의 일원인 사울이라는 한 개인에게 모든 초점을 맞춥니다. 이 선택은 관객으로 하여금 안전한 객석에 앉아 비극을 관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영화 내내 4대 3의 답답한 화면 비율과 얕은 심도는 사울의 얼굴과 어깨만을 선명하게 비추며, 그 주변의 참상은 흐릿한 배경으로 밀어냅니다. 이러한 연출은 유대인이 집단적인 피해자로만 소비되는 것을 거부하고, 생존과 절멸 사이에서 매 순간 선택을 강요받는 한 인간의 고독한 실존을 부각합니다. 사울은 체계적인 학살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기계처럼 움직입니다. 영화는 그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그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감정의 과잉을 덜어낸 이 건조한 태도는 역설적으로 유대인의 고통을 서사적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단호한 윤리 의식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울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동정할 틈을 얻지 못합니다. 그저 사울의 시선을 따라가며 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을 온몸으로 견뎌낼 뿐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은 단순히 죽음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죽음이 일상이 된 공간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인간으로서의 흔적을 남기려 발버둥 치는 주체적인 인격체로 그려집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기존의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취해온 방식과 확연히 구분됩니다. 슬픈 음악이나 감동적인 대사 대신, 영화를 가득 채우는 것은 기계적인 소음과 희생자들의 흐릿한 비명입니다. 사울은 침묵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비인간성에 저항합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언어는 무력해지기 마련입니다. 사울의 굳게 다문 입술과 흔들림 없는 눈빛은, 죽음이 숫자로 치환되는 공장 같은 수용소 안에서도 끝까지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한 개인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저항입니다. 결국 영화는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넘어, 극한의 공포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수용소라는 폐쇄적 공간이 설계한 비인간성의 메커니즘
<사울의 아들> 속 수용소는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영화적 배경과는 완전히 다른 공기를 가집니다. 이곳은 단순히 가학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해 정밀하게 설계된 시스템 그 자체입니다. 카메라는 사울의 등 뒤를 바짝 붙어 따라가며 공간의 전체상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덕분에 관객은 수용소의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 없으며, 사울이 느끼는 폐쇄 공포와 방향 감각의 상실을 고스란히 공유하게 됩니다.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총성, 금속성의 마찰음,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들은 수용소가 하나의 살아있는 괴물처럼 인간을 갉아먹고 있음을 시각보다 강력한 청각적 자극으로 전달합니다.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시간은 선형적인 흐름을 잃고 무의미하게 반복됩니다. 시체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닌 '토막(Stücke)'으로 불리며, 살육은 효율적인 공정의 일부로 전락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존더코만도들이 살아남기 위해 인간성을 유보하는 행위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영화는 그들의 도덕적 결함을 지적하기보다, 인간이 인간을 사물로 취급하도록 강요하는 거대한 구조의 폭력성을 묵묵히 폭로합니다. 사울의 시야에서 흐릿하게 처리되는 시체들의 모습은, 수용소가 인간의 존엄을 지워나가는 방식을 영화적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너무나 거대한 악 앞에서는 눈을 부릅뜨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영화는 좁은 화각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합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폭력을 묘사하는 방식의 절제입니다. 영화는 잔혹한 학살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전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소리와 파편화된 이미지를 통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실제 화면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공포를 조성합니다. 이는 폭력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합니다. 관객은 수용소라는 공간이 어떻게 한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하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이 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체감하게 됩니다. 공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정의하는 이 비정한 풍경 속에서, 우리는 문명이 쌓아 올린 윤리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목격하며 깊은 절망과 마주하게 됩니다.
구원의 몸짓이 던지는 숭고하고도 위태로운 윤리적 질문
영화의 핵심적인 갈등은 사울이 가스실에서 살아남았다가 결국 숨을 거둔 한 아이를 발견하면서 시작됩니다. 사울은 이 아이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믿으며, 수용소라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아이의 시신을 수습해 유대교 율법에 따른 정식 장례를 치러주려 합니다. 이 '구원의 몸짓'은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위험한 선택입니다. 시체를 묻어줄 랍비를 찾아 헤매는 사울의 집착은 동료들의 탈출 계획을 위태롭게 만들고, 자신의 목숨마저 담보로 내놓는 광기 어린 행동으로 비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행위를 영웅적인 결단으로 미화하거나, 혹은 민폐를 끼치는 어리석은 짓으로 폄하하지 않고 그저 사울의 뒤를 묵묵히 따를 뿐입니다. 사울이 행하는 장례 의식은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아이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며, 수용소의 비극이 멈추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원의 몸짓이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품위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숫자로 환원되고 죽음이 쓰레기처럼 처리되는 곳에서, 한 구의 시신을 정중히 묻어주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시스템에 대한 가장 강력한 거부권 행사가 됩니다. 사울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아이의 육신이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수용소 안에서 아직 죽지 않은 자신의 영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종교적 의례를 넘어선, 인간 존재의 근거를 찾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결국 영화는 우리에게 서늘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일 당장 죽음이 예정된 지옥에서, 타인의 존엄을 지키는 행위가 과연 의미가 있는가? 생존이라는 절대적 가치 앞에서 윤리는 사치에 불과한 것인가? 사울의 아들은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다만 사울의 무모한 여정을 통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살아남는 기술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고 죽는가'에 대한 의미의 사수라는 점을 보여줄 뿐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숲 속으로 도망친 사울이 낯선 아이를 보며 짓는 유일한 미소는 그가 끝내 도달하고자 했던 구원이 무엇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이 불편하고도 장엄한 질문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우리 가슴속에 남아,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타인의 고통을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할지 되묻게 만듭니다. <사울의 아들>은 홀로코스트를 재현하는 영화가 아니라, 인간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으며 그 속에서도 무엇을 지킬 수 있는지를 묻는 작품입니다. 유대인, 수용소, 그리고 구원의 몸짓은 거대한 역사보다 한 인간의 선택에 집중합니다. 이 영화가 남기는 불편함은 바로 그 질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지옥의 끝에서 사울이 건져 올린 것은 아이의 시신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인간의 마지막 얼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