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오랜 시간 장애인 복지 현장에서 일하며 수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백인 혼혈아였던 설리는 양쪽 목발에 의지하며 조용히 미소만 짓던 아이였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두 자녀를 훌륭히 키워내며 오히려 저에게 사과 한 박스를 보내는 '베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장애란 무엇일까요? 단순히 신체적 손상만을 의미하는 걸까요? 저의 경험상, 장애는 개인의 상태를 넘어 우리 사회가 어떻게 그들을 대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입니다.
장애인의 정의와 호칭의 변화
장애인(Persons with Disabilities)이란 신체적·정신적 손상으로 인해 일상생활이나 사회활동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Persons with Disabilities'라는 표현은 집합적 대상인 'The Disabled'와 달리 개별적 권리를 강조하는 용어로, 국제연합(UN) 등 국제기구에서 공식화하고 있습니다(출처: UN 장애인권리협약). 쉽게 말해, 장애인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부르기보다는 각각의 존엄성과 권리를 가진 개인으로 존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한국에서는 과거 '장애자(障碍者)'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1990년대 이후 '장애인(障碍人)'으로 수정되었습니다. '자(者)'라는 한자가 주는 낮춤의 뉘앙스를 피하고, '노인', '백인'처럼 특정 특징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인(人)'을 사용함으로써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북한은 여전히 '장애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Handicapped'라는 용어가 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지양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Mentally/Physically Challenged(도전받는 사람)'라는 정치적 올바름(PC)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또한 자폐나 ADHD 등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을 가진 이들은 스스로를 'ND'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신경다양성이란 뇌의 작동 방식이 다를 뿐 결함이 아니라는 관점을 의미합니다.
저는 삼육재활원에서 일하며 목발을 짚고도 홱홱 날아다니던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들은 스스로를 '문어다리 삼총사'라 부르며 낄낄거렸습니다. 신체적 손상이 있어도 그들은 자신을 'Handicapped'로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호칭의 변화는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라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의 진화를 보여줍니다.
장애의 세 가지 분류: 신체적·정신적·사회적
장애를 이해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신체적 장애(Physical Disability)는 외부 신체 기능인 지체, 시각, 청각 등이나 내부 장기인 심장, 신장 등의 손상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영어권에서는 휠체어 등의 보조 기구로 보정이 가능하기에 많은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Handicapped'로 느끼지 않는 주체적인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 정신적 장애(Mental/Psychiatric Disability)는 인지 능력, 정서 조절, 사회적 적응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장애입니다. 발달장애(지적, 자폐성)와 정신질환으로 인한 장애가 포함됩니다. 최근에는 이를 '질병'이 아닌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강합니다.
셋째, 사회적 장애(Social Disability)는 신체나 정신의 결함 여부와 상관없이 사회적 시스템과 환경이 개인을 배제할 때 발생하는 장애입니다. 디지털 소외(키오스크 사용 불가 등), 제도적 차별, 의사소통 장벽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장애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장벽(Barrier)'과의 관계에서 정의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특정 상황에서 '사회적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설리가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까지 올라오기 위해 동네 아주머니를 고용하고 택시를 대절해야 했던 상황을 떠올립니다. 그녀의 신체적 손상 자체보다, 장애인 가족이 대중교통을 편하게 이용할 수 없는 사회적 시스템이 더 큰 장벽이었습니다. 실제로 현대 장애학(Disability Studies)에서는 손상(Impairment)과 장애(Disability)를 엄격히 구분합니다. 손상은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생물학적 상태를 말하지만, 장애는 그 사람이 사회활동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건물 계단, 좁은 화장실, 정보 접근의 차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손상의 치료가 아니라, 손상을 가진 사람이 시민으로서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환경의 제거입니다.
후천적 장애의 압도적 비율과 그 의미
장애는 발생 시점에 따라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요인으로 구분됩니다. 선천적 장애(Congenital Disability)는 태어날 때부터 혹은 출생 과정에서 발생하는 장애로, 전체 장애인의 약 10~12% 내외를 차지합니다. 유전적 요인, 태아기 환경적 영향, 출산 시 사고 등이 원인입니다.
반면 후천적 장애(Acquired Disability)는 출생 후 성장 과정이나 성인기에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발생하는 장애로, 전체 장애인의 약 88~90%를 차지합니다(출처: 보건복지부 장애인실태조사). 여기서 질병적 요인이 약 56%, 사고적 요인이 약 32%를 차지합니다. 쉽게 말해, 당뇨 합병증, 뇌졸중, 치매, 암 등 만성 질환이나 교통사고, 산업재해, 일상생활 속 추락이나 화상 등 외부 물리적 충격이 대부분의 장애 발생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솔직히 이 통계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후천적 장애가 90%에 육박한다는 것은, 장애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누구나 생애 주기 어느 시점에서든 예상치 못한 질병이나 사고, 혹은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적 압박에 의해 장애를 갖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설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장애를 '타고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삼육재활원에서 만난 많은 아이들은 교통사고나 질병으로 장애를 갖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후천적 장애가 저소득층과 위험 노동군에서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이는 후천적 장애가 예측 불가능한 '운'의 영역이 아니라, 안전망이 부재한 노동 환경과 의료 접근성의 불평등이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물임을 의미합니다. 사고를 '개인의 불운'으로 치부하는 순간, 예방을 위한 사회적 책임은 은폐됩니다.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은 '디지털 에이블리즘(Ableism)'의 확산입니다. 에이블리즘이란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 구조가 장애인을 차별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키오스크나 앱 결제가 필수가 된 세상에서, 기술은 편리함을 제공하는 동시에 특정 계층을 사회적으로 '기능적 문맹'으로 만듭니다. 제 경험상, 설리가 트럭을 장만했을 때 생활보호대상자에서 탈락했던 것처럼, 현재의 장애 등급제나 서비스 판정 도구는 장애인의 삶을 오직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없는가'라는 수치적 무능력으로만 평가합니다. 이러한 시스템은 장애인이 사회적 기여를 하거나 자립하려는 의지를 보일 때 오히려 지원 수급 자격을 박탈하는 역설을 낳습니다.
저는 설리가 생활보호대상자에서 탈락했을 때 걱정스러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저를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동안 정부 도움 많이 받았잖아요. 우리가 안 받으면 더 어려운 사람이 받게 되겠지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아니라 베푸는 기쁨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사회적 복지는 '무능력의 증명'에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손상과 관계없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보편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설리는 현숙한 아내이자 엄마로서 평범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엄마를 닮아 또렷한 딸은 이제 비서로 일하고, 아들은 군 제대 후 취업 준비 중입니다. 장애가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장성한 자식들을 보며, 저는 그녀가 평범치 않은 삶의 재료들을 얼마나 훌륭하게 요리해 냈는지 실감합니다. 유엔이 말한 10%의 선천적 장애인, 그리고 90%에 달하는 후천적 장애의 위협 속에서 사람들은 절망을 먼저 배웁니다. 하지만 설리는 장애라는 '상태'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가 그어놓은 '장벽'을 자신의 조용한 미소와 성실함으로 허물어뜨렸습니다.
장애인이 더불어 산다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고 나아가 타인에게 사과 한 박스를 보낼 수 있는 '마음의 부자'가 되는 과정입니다. 저는 오늘도 그녀가 큰 소리로 떠들던 목소리를 떠올립니다. "선생님, 시골에서 좋은 마늘 구했어요! 맛있는 사과 보낼게요!" 그 목소리에는 베푸는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장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환경과 시스템이 바로 누군가를 장애인으로 만들 수도, 혹은 그들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